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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대구지역의 한 섬유공장에서 여공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 <대구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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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대구 북구 제3산업공단 조성 당시 이 일대를 항공촬영한 사진. <대구시 제공> |
대구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주역이다. 60~70년대 대구의 섬유산업은 수출을 주도하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섬유산업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동차부품산업은 세계 5대 차량생산국의 든든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밖에도 건설업이 한때 수도권까지 진출하면서 전국을 호령했고, 식음료산업도 50년대 이후 꾸준히 지역경제를 이끌고 있다. ‘대구 장수기업 이야기’는 광복 이후 우리나라 경제의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해 온 지역산업의 발자취를 70년 이상 한 우물을 파고 있는 기업들의 생생하고 치열했던 순간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衣 나 일 론
1957년 직포·63년 원사 생산
90년대‘밀라노프로젝트’눈길
食 麵·醬·酒
풍국면·삼화식품·금복주 등
60∼80여년 외길…전국 평정
住 주택 빅3
청구·우방·보성 업계 기린아
첫 지하주차장 등 아파트 신화
車 기계 부품
자전거 부품 생산업체의 변신
2000년대 비약 발전 주력산업
◆일제강점기 대구산업 태동
대구의 산업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며 공업을 크게 장려하면서부터다. 대구상공회의소 100년사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1년까지 3년간 대구의 공장은 254곳에서 927곳으로 무려 4배나 늘었고, 종업원 역시 7천118명에서 1만194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대구의 공업은 제사업(製絲業)과 제직업·정미업·철공소 등이 주를 이뤘다. 광복 직전까지 대구의 전체 공장 중 85%가 일본인 소유였으나,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이 공장들은 적산(敵産)으로 처리돼 한국인들에게 매각됐다. 그러나 원료 확보난과 기술력 및 전력 부족 등으로 전체 공장의 35%만 가동됐다.
한동안 부진했던 대구의 공업은 1948년 이후 원료 확보난이 다소 해소되면서 직물업계를 중심으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신규 공장도 늘어나 1950년에는 공장 수 1천447곳, 종업원 1만4천명의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
◆60~70년대 섬유산업 호황
대구의 공업이 광복 전 수준을 회복해 가는 시점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전쟁은 오히려 대구 산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쟁으로 인해 경인지역의 방직공장들이 파괴되면서 대구 직물공업이 더 크게 신장했다. 특히 전쟁기간은 물론 전후 재건기에도 의류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대구 섬유산업은 급격히 성장했다. 6·25전쟁은 대구 섬유산업의 양적팽창을 촉진하는 일대 전기가 됐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합성섬유인 나일론 원사와 나일론 직물 생산을 대구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나일론 직물은 값비싼 사치품으로 인기가 매우 높아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고, 수입도 해마다 늘었다. 섬유업계는 나일론 원사 공장의 설립이 시급한 과제였다.
1957년 대구에 설립된 한국나일론(코오롱의 전신)이 나일론 직포 생산을 시작했다. 그 뒤 1963년 8월 필라멘트 나일론사 공장을 준공해 원사를 시판함으로써 대구 직물업계는 물론 전국의 섬유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후 대구는 국내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혔고, 70년대까지 수출을 주도하며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선진국의 수입규제 강화와 개발도상국의 추격 등으로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에 1990년대 들어 대구시는 ‘밀라노 프로젝트’를 통해 섬유산업의 구조고도화를 추진했고, 현재는 첨단 신소재 및 기술 개발 등을 통해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수도권까지 점령한 건설업
대구의 산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바로 건설업이다. 과거 청구와 우방·보성 등 지역의 빅3 건설사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때가 있었다. 1973년 창립한 청구는 1978년 대구 최초의 고층아파트인 대봉청구맨션을 지으면서 지역의 대표적인 주택업체로 자리매김했다. 그 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아파트 시장에 진출하면서 업계의 기린아로 두각을 나타냈다.
청구보다 조금 늦은 1978년 대구에 첫발을 내디딘 우방 역시 주택업계에 숱한 화제를 뿌리며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살기 편한 집을 짓겠다’는 단순한 철학으로 1985년 대구지역 주택보급 1위 업체로 부상했다. 1987년에는 달서구 두류동 대구타워를 인수해 우방랜드(현 이월드)를 조성했고, 청구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진출에도 성공했다.
1974년 삼보주택으로 출발한 보성이 국내 굴지의 주택건설회사로 성장한 시기도 이때였다. 1986년 보성상아맨션을 지으면서 전국 최초로 지하주차장을 마련, 주목을 끌었다. 이후 방음블록시스템을 도입, 아파트 상·하층 간 고질적인 문제인 소음을 줄인 업체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들 3사 모두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명성을 잃게 됐다.
최근 대구의 아파트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면서 지역 건설업체들이 대구 건설업계의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다. 지난 7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올해 전국 건설업체 시공능력평가에서 화성산업(45위)과 서한(60위), 화성개발(92위)이 100위권 안에 랭크되는 등 지역 건설업체들이 과거 영광 재현에 나서고 있다.
◆자동차부품, 주력산업으로
대구의 자동차부품산업도 섬유산업과 비슷한 시기에 태동했지만 한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국내 자동차 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비로소 지역의 자동차부품 산업이 빛을 보게 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섬유산업을 제치고 지역의 주력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앞서 1950~60년대 지역의 대표적인 자동차부품 기업인 SL과 평화산업·경창산업이 설립됐다. 창립 초기 이들 기업은 자동차 부품이 아닌 자전거 부품을 주로 생산했다. 이후 1970년대부터 헤드램프와 변속기 부품·와이퍼 모듈 등 각종 자동차 부품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84년 달서구 갈산동 일대에 성서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자동차부품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관련 업종들이 한 곳에 모이면서 기술력과 경쟁력이 한층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2006년 대구 자동차부품 업종의 부가가치액은 1조2천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섬유업종(1조810억원)을 앞질렀다. 또 2008년 4월에는 차부품을 비롯한 기계류가 대구 전체 수출액의 25%인 2억7천400만달러를 기록해 섬유류를 제치고 지역 수출 1위에 올랐다.
이제는 대구를 섬유도시가 아니라 자동차부품도시로 불러도 무방하다. 2000년대 이후 대구의 자동차부품 산업은 디지털 설계 및 생산 등 첨단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세계적인 자동차부품 공급기지화를 꾀하고 있다. 또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자율주행차 등 미래 자동차 산업의 변화에도 대비하고 있다.
◆전국을 평정한 식음료산업
섬유와 자동차부품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식음료업도 대구 산업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역에서 시작해 전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거듭난 회사들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풍국면이다. 1933년 대구 대신동에서 시작한 풍국면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80여년간 국수 외길만을 고집해 왔다. 그 결과 국수 분야에서는 단일회사로 국내 1위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품질과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기업과 대형마트 등에도 OEM이나 PB상품 형태로 납품하고 있다.
삼화간장으로 유명한 삼화식품도 지역을 대표하는 식품기업이다. 1953년 대구 남산동에서 삼화장유사로 시작해 60여년 전통의 장류 전문기업으로 거듭났다. 지역의 소주 업체인 금복주도 빼놓을 수 없다. 1957년 설립된 이래 ‘맛있는 참’ 등 지역민의 입맛에 맞는 소주를 지속적으로 개발, 출시해 지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